저주받은 소녀(Cursed)를 보기 위해 견뎌야할 몇 가지 아쉬움

영화든 드라마이든 판타지 배경의 작품도 꽤 좋아하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그래도 어느정도 즐기는 편이다. Netflix에서 제작한 위처도 나름 재미있게 봤고, 이번에 저주받은 소녀라는 드라마를 방영하고, 인기순위에서도 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등록된 첫 시즌을 모두 보았다.

배경/소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최소한으로 하고자 하지만, 완전히 얘기하지 않는 것은 어려워 보이니 곧 드라마를 볼 생각이 있다면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드라마에 처음 호기심을 가진 것은 이 이야기가 아서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아서왕의 전설에 관심 한 번 가져보지 않은 사내가 몇 이나 될까. 이야기의 세세한 내용은 몰라도 아서왕과 멀린, 란슬롯과 원탁의 기사들, 엑스칼리버 정도는 다 알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내가 잘 모르는 부분에서 시작한다.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물의 여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일종의 프리퀄이라 생각하면서 드라마를 보았다.

페이 족이라 불리는 종족(요정fairy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이 이야기의 한 축이고, 주인공 뿐아니라 멀린도 여기에 속한다. 이 페이족은 다시 세세하게 하늘민, 뱀족, 사슴족 등으로 나뉜다. 이들은 인간에게 밀려서 숲속, 늪지대, 동굴 속으로 밀려나지만 정화를 목표로 페이족 마을에 들이닥쳐 모두를 학살하는 교회 세력에 의하여 멸망의 위기에 처한다.

주인공이 살던 마을도 이 살육에 내던져지고, 겨우 살아남은 주인공이 어머니가 전해준 검을 들고, 어머니의 유언을 쫓아 멀린을 찾아나서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몇 가지 거슬리는 점들

시즌 1은 한 시간 분량의 에피소드 10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언뜻 사건이 꽤 급박한 듯 하지만 사실 그다지 많은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마지막까지 보고나면, 시즌 1은 시즌 2 이후를 위한 장대한 예고편이라는 느낌이 들긴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단지 아래에 설명할 다른 아쉬운 점들과 겹쳐져서 시즌 2부터는 그다지 보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만약 내가 말한 거슬리는 점들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다면 시간을 한 번 들여서 볼만은 할 것이다. 나름의 아기자기한 맛은 있다.

1. 조금 과도하게 느껴지는… 정치적 올바름

일단, “아서왕의 전설”의 변주임에도 불구하고 아서가 흑인이다. 카톨릭이 갓 전파된 고대 영국이 배경인데, 거기에 흑인이 살았던가? 페이족 중에 아시아 계로 보이는 배우나 흑인으로 보이는 배우가 있지만, 인간과는 다른 종족이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서왕이? 보다보면 적응이 되지만, 초반에 몰입을 막는 요소인 것이 사실이다. (한참 동안 저 아서는 아서왕의 아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세상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라고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들 중 주요 배역은 멀린부터 우서왕, 그리고 아서에 이르기까지 두엇을 빼면 모두 얼간이들이다. 반면에 주요 여성은 주인공인 니무에와 아서의 여동생과 페이족 조력자를 비롯하여 모두 자기 몫은 거뜬히 하는 멋진 이들이다.

2. 개연성이 부족하다

꽤나 먼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그 시대의 사람들은 당연히 지금 우리보다 여러가지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위생에 대한 것이라거나 몇몇 과학 상식들 같은 것. 그런 것은 우리가 더 많이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 시절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어리석지는 않다. 고작 1,500년 전의 사람들이면 지금 우리보다 되려 더 현명한 구석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 드라마에서는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

그러다보니 개연성도 부족하다 느껴지고, 몇몇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개연성이 부족하다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예컨데, 위핑멍크는 대부분 홀로 움직이면서 페이족을 죽인다. 정황상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고, 위핑멍크와 그 상관의 명을 받는 붉은 팔라딘들이 어린 페이족을 죽이는 장면도 여럿 보였다. 그런데 위핑멍크가 갑자기 거웨인에게 감화를 받았는지, 어린 아이를 고문하려한다는 이유로 붉은 팔라딘을 배신하고, 어린 페이족 아이를 구해서 달아나는 것. 그 긴 드라마에서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단 한 회만에 이루어진다.

3. 검과 마법

판타지 물의 꽃은 화려한 마법이다. 그리고 호쾌한 액션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는 둘 다없다.

일단 검과 창과 활과 여러 둔탁한 무기를 들고 다투는 장면은 물론 여럿 나온다. 하지만, 세련된 액션이 아니다. 특히, 주인공 니무에가 무적의 검의 힘을 빌려 검을 휘둘러 적을 벨 때는, 니무에는 칼 무게를 못 이겨서 이리저리 휘청이듯 겨우 휘두르고, 드라마 상의 적들인 붉은 팔라딘은 친절하게 기다렸다가 칼에 몸이 갈라져 준다.

그나마 검을 잘 쓰는 것으로 묘사되는 캐릭터가 몇 있다. 위핑 멍크, 그린 나이트 등. 하지만 이 둘이 검을 맞대는 것은 극히 드물고, 그나마도 역량차이가 많이 나서 위핑 멍크가 이리저리 통통 튀면 누구든 쓰러지거나 죽는다. 그러니 아슬아슬한 몰입감이 역시 없다.

마법의 측면을 보자면 상태가 더 심각하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멀린이 마법을 잃어버린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멀린이 이 드라마의 유일한 마법사라는 점이다. 니무에도 물론 신비로운 힘이 있지만, 나무나 풀 때기 좀 움직여서 사람 괴롭히는 수준이고, 화면에 초록색이 한 가득인 상황에서 다른 초록색이 뱀처럼 스슥 움직이다보니 별 티가 안난다.

그 외에는 마법이랄 것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10화에 가면 10화의 거의 마지막에 멀린이 마법을 되찾아서 5분 정도 마법을 좀 쓰는데, 엄청 공을 들여서 길게 주문을 외우고는 달려드는 두어명에게 불도 붙지 않는 번개를 한 줄기씩 떨어뜨린다. 영 별 게 없다. 멀린 스무 명이 있어도 볼드모트는 커녕 스네이프하고 싸워도 질 것 같다.

판타지 물에 으레 기대하는 화려한 볼거리가 없다보니 마지막화를 보고도 맥이 좀 빠진다고 해야하나.

그러니,

판타지 영화/드라마의 엄청난 팬이며, 내가 위에 말한 점들이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면 한 번 쯤은 볼만하지 않을까.

드라마라기 보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그래서 아서왕 전설을 — 약간 따분할지라도 — 좀더 현실적으로 재구성해서 변주한 시리즈물이라고 생각하면 나름의 재미를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얼개 측면에서는 10화에서 정체가 밝혀지는 랜슬롯과 퍼시발. 다시 검을 손에 넣은 멀린과 계곡에 떨어진 니무에와 꿈을 이룬 아그네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시즌 1을 보고나니 그 호기심에 다음 시즌을 보기에는 시간이 좀더 아깝다 느껴지는 것 뿐.

타다와 타다금지법

타다의 시작

타다는 2018년 10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9개월만에 100만명이 이용하는 등 큰 인기를 끈 실시간 차량 호출 서비스이다. 통상적으로는 택시 면허가 없다면 이런 식의 영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과거 우버에서 국내에 진출한 적이 있었지만, 이 문턱을 넘지 못하고 물러난 바가 있다. 타다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상의 빈틈을 이용해서 영업을 시작했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제 34조
제34조(유상운송의 금지 등) ① 자동차대여사업자의 사업용 자동차를 임차한 자는 그 자동차를 유상(有償)으로 운송에 사용하거나 다시 남에게 대여하여서는 아니 되며, 누구든지 이를 알선(斡旋)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누구든지 자동차대여사업자의 사업용 자동차를 임차한 자에게 운전자를 알선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외국인이나 장애인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운전자를 알선할 수 있다.
③ 자동차대여사업자는 다른 사람의 수요에 응하여 사업용자동차를 사용하여 유상으로 여객을 운송하여서는 아니 되며, 누구든지 이를 알선하여서는 아니 된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시행령 제 18조
제18조(운전자 알선 허용 범위) 법 제34조제2항 단서에서 “외국인이나 장애인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란 다음 각 호의 경우를 말한다.
1. 자동차대여사업자가 다음 각 목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동차 임차인에게 운전자를 알선하는 경우
가. 외국인
나. 「장애인복지법」 제32조에 따라 등록된 장애인
다. 65세 이상인 사람
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
마. 자동차를 6개월 이상 장기간 임차하는 법인
==바. 승차정원 11인승 이상 15인승 이하인 승합자동차를 임차하는 사람==
사. 본인의 결혼식 및 그 부대행사에 이용하는 경우로서 본인이 직접 승차할 목적으로 배기량 3,000시시 이상인 승용자동차를 임차하는 사람

법 34조에 의하면 차를 대여하면서 운전자를 동시에 파견할 수 없지만, 법 18조 제1호 바목에 따라서 11~15인승의 승합자동차인 경우에 운전자 알선이 혀용되는 것을 이용하여 택시와 유사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본래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에서 대통령령을 통해 11인승 이상 승합차 임대 시, 임차인에게 운전자를 알선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국내에 면허가 없는 관광객 (패키지 여행객 같은) 다수가 차를 빌릴 때, 운전자도 함께 제공 받아서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법에는 위의 예외가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별도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성장과 갈등

성장

택시의 기본요금이 3,800원인 반면에 타다의 기본요금은 4,000원이다가 2019년 말 경에 4,800원으로 올랐다. 택시의 기본요금이 3,000원이던 시절에 4,000원으로 정해졌던 것으로 약 30% 정도 더 비쌌다.

이처럼 가격이 꽤 높음에도 불구하고 타다는 출시 9개월만에 회원 100만명을 돌파하고, 6,000명이 넘는 드라이버를 고용(제대로 된 고용이라고 보긴 어렵겠다)하는 등 짧은 기간에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사람들이 이토록 크게 호응한 바탕에는 택시에 대한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나도 여러 번 겪어 봤지만, 매우 불친절하거나 불법적인 합승을 강요하는 택시 기사가 종종 있고, 누구라도 한 번 정도는 이런 기사를 겪어 봤을 것이다.

타다는 지나가는 차를 불러 세울 수는 없고, 스마트폰 앱을 통해서만 호출할 수 있다. 따라서, 목적지가 기사에게 미리 알려진다. 타다를 타보지는 않았지만, 호출한 승객이 맞는지 정도만 확인하고 내릴 때까지 말을 걸지 않는다고 한다.

차 안에서는 음악만 잔잔하게 흐르고, 기사는 조용하다. 차가 서면 계산하려고 애쓸 필요없이, 그냥 내리면 자동으로 계산이 끝나기 때문에 여러모로 거슬리는 점이 적고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갈등

내 기억에 타다가 택시의 주적이었던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택시 업계에서 파업을 하거나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때, 그 목소리는 거의 항상 카카오택시를 향했다. 아마 새롭게 부상하는 택시의 경쟁자들 중, 가장 큰 기업에서 운영하기 때문이었지 않나싶다.

기존의 택시 업계와 카카오 택시나 타다와 같은 교통 신기술 기업의 갈등은 점점 극단적이 되어 갔다. 일단, 택시에 대한 불만은 별개로 택시 업계에서는 상당히 저렴한 요금이 꽤 오랜 기간 강제되어 있었고, 그 저렴한 요금의 반대급부로 택시 면허를 통해 공급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수립되어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 새로운 회사들은 정책의 울타리 밖에서 영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유사 업종의 공급을 크게 늘려 놓았고, 동시에 그 쪽 사람들은 높은 요금을 받아가니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반대로 새로운 업체에서는 고객의 호응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자연스런 변화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고, 택시의 반발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사회의 발전과 고객의 편리를 가로 막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중재와 갈등의 불씨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오기 시작하면서, 정부나 국회에서도 계속 한 발 물러서 있을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택시와 카풀업계의 상생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 기구이고, 2019년 3월초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사회적 대타협 기구에서는 일단 카풀은 출•퇴근 시간에만 허용하기로 한 것을 제외하고 크게 의미있는 합의는 없었다. 그리고 타다 측의 참여는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타다는 카풀업체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당장 반발이 나왔다.

타다는 대타협의 테두리 밖에서 영업을 지속했고, 결국 2019년 10월에는 서비스 도착 가능지역을 기존의 수도권 일부지역에서 수도권 전역으로 확대하여, 운영 차량도 2020년에는 1만대까지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선언에 택시 업계는 다시금 크게 반발하였고, 이런 여러가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방책으로 국토부에서도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을 개정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타다 금지법?

타다가 반대해온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은 2020년 3월 6일에 국회 본회의에서 원안이 가결되었다.

개정안에서는 기존에 승차정원이 11~15인승이면 임차하는 누구라도 운전자를 알선받을 수 있었던 것을 개정하여, 관광을 목적으로 승합차를 임차하며, 대여시간이 6시간 이상이거나 대여 또는 반납장소가 공항 또는 항만인 경우로 제한하였다.

개정된 법률에 의하면 타다의 방식으로는 운영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에, 타다의 모회사인 쏘카 이재웅 대표는 법률 개정안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본인의 페이스북에 올리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타다에서는 원래의 방식으로는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기존의 사업을 대폭 축소하고, 프리미엄 사업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개정안을 정말 타다 금지법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빈틈을 메워가는 과정

결과적으로 개정안으로 인해 타다처럼 승합차를 이용해서 택시 서비스를 제공하던 업체로서는 기존 사업이 어려워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개정안의 주요 내용은 1차적으로는 기존 법안이 관광객 편의 제공이라는 도입 목적에 맞도록 빈틈을 메우고, 플랫폼 운송사업의 운용 요건을 명확하게 했다.

어느 나라, 어느 시기든 법에 허점이 드러나는 때는 항상 생긴다. 특히, 기술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법이 기술을 따라잡았을 때, 결과는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첫 번 째는 법이 새로운 사업을 인정하고, 그 사업이 적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법의 빈틈을 메워서 신사업을 종료하게 되는 것이다.

판단 기준은 결국 사회 전체의 후생을 더욱 증가시키는 방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타다와 같은 운송 사업에 있어서는 결국, 기존 법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 사회적으로 더 유리하다가 판단하게 된 것 뿐이다.

물론 나로서도 상당수 택시의 불친절과 길을 멀리 돌아가는 것은 불만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의 한 원인이 꽤 긴 시간 억눌린 택시요금에 있는 것도 사실이고, 타다나 우버같은 공유 차량이 적절한 대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타다나 우버는 결국 자영업의 형태를 띤 비정규직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택시에 여전히 불만이 많을 수 밖에 없고, 지금 산업의 속도에 비하면 워낙 답답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존 택시 노동자의 처우를 꾸준히 개선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서비스를 차차 개선해 나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다.

편두통 — 올리버 색스

접점

올리버 색스는 과학하고 앉아있네라는 팟캐스트에서 진행한 과학책이 있는 저녁에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과 함께 소개해주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다. 팟캐스트를 듣던 당시에는 다른 것보다도 책을 통해 소개되는 기이한 정신병적 증상을 신기해하고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으레 그렇듯이 기회가 되면 책을 한 번 사봐야겠다는 생각만 품고 시간을 그저 흘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올리버 색스가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제서야 시간이 더 지나면 그의 책을 읽을 생각도 하지 못할지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전자책으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뮤지코필리아, 편두통, 온더무브를 구입했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꽤 쉽게 읽혔다. 그가 치료 또는 상담을 했던 환자들의 이야기를, 환자들의 개인정보가 드러나지 않게 살짝 재구성하여 이야기를 풀어준 것이다. 한 편 한 편 그의 글을 읽다보면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사려 깊은 배려, 그리고 단지 화학적, 생체적인 분석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총괄적인 이해를 통해 병을 원인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그리고 문득, 내가 지금 이렇게 어떤 평범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조차도 어쩌면 가느다란 줄 위를 조심스럽게 걸어 나가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들고 있는 길고 무거운 장대가 내 중심을 잘 잡아 주겠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

이 책에서도 저자는 여전히 사려깊고 친절하지만, 그렇다고 책 자체가 그리 친절하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책의 옮긴이도 책이 어렵고 모호한 부분이 많았음을 맨끝 옮긴이의 말에서 고백하고 있다. 어쩌면 올리버 색스도 아직 편두통의 모든 것을 알아내지는 못한채, 탐구를 계속하면서 책을 썻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책을 읽으며 힘들었던 것은, 앞서 읽었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비해서 사례에 대한 서술은 매우 간략하고, 뜸한 반면에 전문 용어가 무척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편두통을 겪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짐작으로 묘사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편두통 그 자체에 대하여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 책을 찾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도 굳이 편두통을 자세히 공부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지금도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게된 것 이상으로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올리버 색스가 상담 또는 진료한 환자들의 사례를 차례로 소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편두통이라는 병증 하나에 집중하고 있다. 먼저, 편두통이 어떤 것인지 소개하고, 편두통이 발병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과 사람이 겪는 일, 편두통의 원인과 이를 고려한 여러가지 치료방법 및 그 역사, 편두통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에 대한 본인의 생각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사례는 환자들이 편두통을 겪는 동안 보는 환각 등을 그린 도식과 함께 환자의 증상과 특정 치료를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짧고 건조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편두통

나는 이라는 한자가 어느 한 쪽을 뜻한다고 이해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편두통이라는 증상은 그저 머리 어느 한쪽이 국소적으로 아픈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굳이 이름이 따로 붙은 것은 그 한 쪽만 아픈 증상이 꽤 흔하고 통증이 심한 편이기 때문이라고 믿었는데, 이게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는 것은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어느 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접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통해 이해하기로 편두통은 화학적 또는 전기적인 신호의 교란으로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프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날 수 있는 여러 증상 중에서 어느 하나일 뿐이다. 심지어 복부 편두통이니 하는 식으로 머리가 아닌 다른 곳이 아픈 경우도 있다.

편두통이 일어날 때의 증상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지는데, 편두통 아우라(Aura)라고 불리는 일종의 전조 증상과, 여기에서 이어지는 극심한 발작과 고통, 그리고 고통에서 회복되며 증상이 마무리된다. 일주일에도 여러 번 발작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고,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에 한 번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증상에 있어서도 순식간에 극심한 고통에 빠지고, 여러가지 환시/환각을 겪다가 두어 시간 이내에 마치 죽음에서 부활하듯이 회복하여 넘치는 에너지와 상쾌함으로 다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이 있고, 몇 시간이 넘도록 지리하게 이어지는 고통을 겪고, 고통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진이 빠져서 꼬박 며칠을 고생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

여전히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편두통 아우라이다. 간질의 발작과 비교할만 하지만, 여러 부분에서 상당히 다르다. 책을 기준으로만 생각하자면, 간질은 주로 신체적인 반응에 집중되는 것으로 보이며,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그에 비하여 편두통 아우라는 신체적인 반응에서부터 환각/환시 등 감각적인 것을 거쳐 마침내는 어떤 종류의 고양감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으로 보이며, 시작부터 회복에 이르기까지 길면 수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겉으로는 길게 늘여놓은 간질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면의 작용은 크게 다른 것 같다.

그 치료법은 여러가지가 알려져 있으나, 완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모든 환자에게 통용될 수 있는 방법도 없는 것 같다. 대부분은 약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환자가 편두통을 겪는 주기나 환자가 느끼는 심각한 정도, 어느 수준까지 증상이 진행되었는지 등을 고려하여 그 수준에 맞는 약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편두통의 치료라는 것은 그냥 그렇게 증상을 없어지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어쩌면 편두통만이 아니라 정신이 관여되는 많은 병이 그러할지도 모르겠다.

치료

위에도 간략히 썼듯이 편두통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방법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병의 진행과 환자가 겪고있는 수준에 맞춰서 적당한 약을 쓰면 상당부분 그 발현을 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약을 먹는 방법도 내복하거나 주사제로 맞을 수도 있고, 정기적으로 미리 약을 먹거나 증상이 시작되는 초기에 주사를 맞을 수도 있다.

이러한 치료법을 통해서 어느정도는 편두통이 완화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편두통 증상을 없애는 것 만으로 치료가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치료가 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도 몇 달 길면 2~3년 후에 다시 증상이 강화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원래 있던 편두통이 없어진 대신에 그 시간에 다른 종류의 발작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리고 병이 사라진 자신에게 적응해야하는 문제가 있다. 편두통처럼 삶의 어느 순간을 가져가는 병은, 그 병으로 앓아온 시간이 오래될 수록 삶의 한 부분이 되어간다. 그래서 마침네 그 증상을 완화하거나 자신의 삶에서 제거했을 때, 어떤 이들은 그 병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상황과 비슷한 지도 모르겠다.

예전 매일같이 밤 10시까지 야근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 정도가 되는 여자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은 6시 제 시간에 약속도 없이 퇴근을 해서 집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간에 집에 와 본 적이 없어서, 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티브이를 켜두고 멍하니 보고만 있다가 11시에서야 문득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아 맞아. 씻고 자야지”

병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

병과 치료에 대한 관점에서도 색스의 사람에 대한 따스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정신병적 증세가 있는 것을 그 증상자의 개인적인 문제로 보지않고, 병을 통해서 그 사람이 해소하고자하는, 또는 얻고자 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다. 단순히 병인을 제거하는 것을 치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병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대체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 완전히 건강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지도 모르겠다. 한 편으로는 급박하게 움직이는 도시에 갇혀서 강한 스트레스에 눌려 살기 때문일 것이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우리가 원래의 수명을 넘어서서 아주 오래 살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유전적으로 정해진 인간의 자연수명은 마흔이 되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러니까 건강한 삶을 추구하되, 거기에 강박을 가지지는 말자. 내가 가진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병을 가지게 된 근원을 탐구해야겠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병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은채로, 그 병을 품고 더 건강한 삶을 향해 살아내는 것도 필요하다.

아랫집 청년

대략 5년 전의 일이다.

짧은 유학을 나갔다가 5월의 마지막 날에 한국에 돌아왔다. 아직 집을 구하지는 못한 이유로 잠깐씩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 서울에 머무를 때는 계속해서 한 친구의 집에 신세를 졌다. 그렇게 신세를 진 시간도 어느새 꽉 채운 여섯 달에 가까워 오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또 오래된 친구에게도 약간 — 부디 약간이길 바란다 — 의 불편을 끼치며 생활하고 있었다. 친구의 집은 오르막길에 있어서, 마치 3층 같은 높이의 2층이었는데, 그 아랫집에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 하나와 어머니가 같이 살고 있다. 그리 오래 지내보지 않더라도 그저 일, 이주 정도만 그 아랫집 창문 앞을 지나다녀 보면 금새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나도 백수생활을 좀 길게 하게 되어 지원서를 내거나 하러 나가면 점심 때 쯤이 되어서야 나가고, 또 들어오는 것도 저녁 시간이 늦어서 들어오는데, 그 앞을 오가다 보면 그 청년은 항상 티비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듣기로도 그 아랫집 사내는 군대를 제대한지도 1~2년은 지난 것 같은데, 어디 공부를 하러 나가지도 않고 일을 알아보는 기색도 없이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어머니는 — 어쩌면 홀어머니이실지도 — 매일 나가서 폐지를 주워모아서 생활비를 버는 것 같으니, 그런 아들의 모습에 더 열불이 나지 않을까 짐작한다. 사실 가끔 지나다보면 그 아줌마가 제발 그것 좀 그만하라고 아들에게 소리지르는 것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나 스스로는 회사를 알아보는 중이었고, 또 금방 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자주 그 모습을 보면서 한심스럽다고 생각했다. 아마 무의식에는 나는 그래도 최소한의 노력은 한다, 나는 너보다 낫다는 그런 우월감이 있었던 것 아닐까. 생각이 그렇게까지 진행되고 보면, 사실 이 몇 달을 놀며 시간을 흘려보낸 내가 그걸 그렇게 한심하게 생각할만한 자격이 있는지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결국 내가 보는 것은 점심 쯤의 모습과 저녁 늦은 시간의 모습일 뿐이다. 그 모습이 마치 연속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사내가 낮에 어떤 생활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사실은 그 어머니는 그렇게 오락을 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고, 그 친구는 그 맘 때쯤의 짧은 시간에만 휴식을 취하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다른 시간에는 제 나름대로는 생산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확실히 그러한 사정들을 전혀 모른다.

서울 100K 참가 후기

작년에 트레일런trail run이란 것을 처음 알게 되어서 두 번 대회에 참여했고, 올해에도 상반기부터 한 번 나가보려고 기회를 보다가 마침내 서울100K로 다시 한 번 산악 달리기 대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히 정리하자면 작년부터 참여해본 세 개의 경기 중에서 가장 잘 준비되고, 스탭들도 친절한 경기이면서, 가장 어려운 대회이기도 했습니다. 대회 전에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바로 전에 참여한 51km짜리 대회보다 거리는 조금 짧지만 상승고도는 오히려 훨씬 높아서 초반부터 다리가 후들거렸네요.

신청

50km 이상 트레일런 대회에 한 번은 참여하자를 올해 목표 중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에 올초부터 적당한 대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 고려했던 하나는 사정이 생겨서 못나가고 몇 개를 찍어놓고 고민하던 와중에 멀리 갈 필요없이 서울에서 할 수 있는 대회가 있기에 바로 신청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접수 시작 전에 얼리버드 신청도 받아서 20% 할인 기회가 있었지만, 친구와 점심먹다가 깜박해서 놓치고 정식 접수가 열렸을 때 12만원 다 내고 신청완료 했습니다. (참고로 100km 코스는 20만원)

신청하면서 주의할 점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50km 이상의 코스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최근 6개월 이내의 건강검진 결과를 제출하거나, 대회에 참여해도 문제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과거에 참여한 일정 거리 이상 대회의 완주증을 제출해야합니다. 저는 지난 해 참가했던 DMZ Trailrun대회의 완주증을 제출하였습니다.

장비 검사

장비 검사는 대회 하루 전에 있었습니다. 지난 번 경기에서도 비슷했는데, 워낙 아침 일찍 출발하다보니 당일에 필수 장비를 모두 검사하려면 아마 장비검사만 세 시 이전부터 해야할 거에요. 장비 검사는 하루 전인 10월 18일 오후 세 시부터 밤 10시까지 진행이 되어서 그 중 시간될 때 잠깐 들리면 되고, 검사 자체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신청 당시에 장비검사 시간이 어떻게 될지 확실하지 않았고, 회사에 그 장비를 다 들고 오는 것도 버거운 일이어서 냉큼 휴가를 하루 내버렸지요. 그리고 저녁 8시부터 9시까지는 오리엔테이션이 있습니다. 그 전 대회의 경험을 빌려보자면 코스마크를 알려주고, 주의할 점, 코스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을 해주는데, 시간이 애매해서 저는 불참했습니다.

필수 장비에 대해서만 잠깐 짚어보면 아래 장비들이 포함되고, 대회마다 크게 차이는 없습니다. 이 중에서 헤드랜턴은 예전에는 없어서 없는대로 작은 플래시를 들고 갔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건으로 연락했다가 겸사겸사 물어보니 명확하게 헤드랜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좀 귀찮다하면서도 알리에서 하나 주문했는데, 막상 달리기 시작하고 무척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 레이스백팩과 트레일러닝화
  • 300kcal 이상의 비상식량 (에너지 젤 등)
  • 구급약품 (붕대와 테이핑 정도면 충분)
  • 물컵/물병
  • 헤드랜턴과 여분의 건전지
  • 방수가 되는 재킷
  • 담요 (서바이벌 블랭킷)
  • 휴대전화와 보조 배터리 1개 이상
  • 기능성 의류

바로 기억나는 것은 이 정도이고 CP 중 하나와 완료지점에서 정말 없으면 안되는 헤드랜턴과 방수재킷은 장비검사를 다시 한 번 하더군요. 전날 장비검사했다고, 그냥 빼먹고 왔다가는 실격처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출발

출발시간은 원래 새벽 5시 반이었습니다. 그래서 4시 정도에 일어나서 출발하면 되겠거니 생각했는데, 시간이 30분 당겨져 버렸네요. 그래서 3시 30분 정도로 알람을 맞추고 잤습니다. 혹시 쪽팔리게 제 시간에 못 일어나서 실격되는 거 아닌가 불안해하면서 잠들었는데, 다행히 시간맞춰 눈이 떠졌네요. 뛰다보면 나름 사진도 찍히니까 (경주 중에 스텝들이 사진을 찍어 줍니다. 그런데 그 전 2개 대회에서는 사진을 하나도 못 건졌어요. 분명 몇 번 찍히기는 했는데, 다운 받을 수 있게 올려준 사진 중에 제 것은 하나도 없더라구요…) 씻고, 면도도 하고, 머리도 나름 정리하고, 미리 검사받아둔 장비 가방을 통째로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출발장소인 서울광장에는 4시 40분 정도에 도착했는데, 벌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준비를 다 끝나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네요. 저도 옷 갈아입고 필수 장비 둘러메고, 나머지 짐은 가방에 담아서 물품보관소에 맡겼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중에 출발 장소로 모이라는 방송이 나오는 것을 보니 시간은 나름 잘 맞춰서 온 것 같네요. 한 가지 별 생각없이 그냥 분위기타고 출발하느라 물병에 물을 담는 것을 깜박했어요. 덕분에 처음 9.7km는 물 없이 열심히 뛰었습니다.


저는 언듯 나경원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나경원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유명인사의 시총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문을 통과하면서 기록이 시작되는데요. 문을 통과하면 정동길을 통해서 강북삼성병원 뒤쪽 행촌을 거쳐서 인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인왕산 초입과 성벽이 보이는 부분까지는 조명이 많은데다 렌턴을 켜둔 사람이 많이 몰려있어서 특별히 조명이 필요없었는데, 좀 가다보니 사람 사이 간격이 멀어지고 빛도 한 줌 없어져서 헤드랜턴이 꼭 필요했습니다. 대략 6시 30분 정도되니 어스름하게 밝아오네요.

끝없는 달리기

처음 대회를 시작하면서 목표는 10시간, 혹시 잘만 하면 9시간까지도 기록을 단축해 보겠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지난 번 대회가 51km에 딱 9시간 59분을 찍었거든요. 세번 째 CP를 지나며 그게 말도 안디는 목표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 이후로 갑자기 힘이 나서 엄청 빠르게 뛴다해도 11시간 안으로 들어오기는 힘들었거든요.

기억을 좀 더듬어 보면 직전의 대회는 초반에 제법 가파른 언덕이 하나 있었고, 그 이후로는 상대적으로 평탄하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히 경사랄게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대회는 아래 코스를 잠깐 봐도 알겠지만, 나름 가파른 언덕이 세 개, 그 중에 하나는 다른 것의 두 배 정도로 높았어요. 더구나 이사한 이후로 근처에 산이 없어서 산을 달리는 연습을 잘 안했더니, 첫 언덕에서 벌써 다리가 후들거리고, 두 번째 산에서는 오르막을 좀 오르다보면 허벅지에 쥐가 나려고 해서 고생했습니다.

일단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내리막은 그래도 수월할 것 같은데, 실제 뛰어보면 별로 그렇지가 않아요. 물론 오르막에 비해서 몸에 걸리는 부하는 적은 편이지만, 내려올 때도 몸이 잔뜩 긴장하고 힘이 들어가서 힘듭니다. 일반 산길도 내려오다보면 미끄러지기 쉽고 이런 저런 돌부리가 있어서 몸에 힘을 바짝줘야하는데다, 특히 계단을 만들어 둔 곳은 계단을 내려올 때 몸에 충격도 많이 오고, 불규칙하게 만들어진 계단에서는 걸음도 좀 꼬이거든요. 그래서 오르막을 오를 때는 오르막도 힘들지만, 이 오르막 다음에 반드시 내리막이 나올 것이라는 것도 절 힘들게 해요. 징글징글하달까. 뛰면서 어느정도 체력을 비축할 수 있는 구간은 역시 평지밖에 없죠. 그런데 평지가 많으면 또 재미가 적어지고…

아무튼 몸이 좀 (많이) 힘들어서 그렇지 운영 측의 준비도 만족스럽고, 코스도 재미있었습니다.

준비, 체크포인트

트레일런 또는 울트라마라톤이라는 경기들이 코스는 상당히 길고, 또 그렇다고 생존 훈련같은 것은 아니니까 대회 참여자들을 위한 몇 가지 준비를 해둡니다. 국제 경기이다 보니 당연히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코스마크가 잘 표시되어 있고, 헷갈릴 법한 갈림길이나 복잡한 차도를 지나야하는 곳에는 스텝을 배치해서 길을 안내해주고, “화이팅” 정도는 외쳐줍니다. 물론 가끔 길이 나뉘는 곳에서 표시가 꼼꼼하게 되어 있지 않아서 헷갈리는 곳이 좀 있긴 했는데요. 크게 문제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체크포인트는 대략 10km 간격으로 4개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물과 음료, 과일, 간식, 몇 곳에서는 밥과 라면도 제공을 해줬습니다. 전에 나갔던 대회에서는 50km 참가자는 밥을 안주고 100km 참가자에게만 밥을 줬었는데, 여기는 공평하게 모두 주네요. 1번 CP에서는 몇 종류 과일과 오이, 물, 몽쉘같은 간식이 있었고, 저는 오렌지 하나 먹고 물 채워서 마시고, 오이 하나 집어들고 출발했네요. 두 번 째 CP에서는 밥도 줬습니다. 밥이라고 특별한 것은 없고, 설렁탕에 김치 따위가 반찬으로 나왔는데,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네요. 저는 한참 뛰었더니 잘 안 먹혀서 밥은 말지 않고 국물만 부어서 한 그릇 마시고 나왔습니다. 세 번 째 CP로 가는 중간에 숨겨진 CP가 하나 나옵니다. 여기서는 다른 CP처럼 기록 계측을 하지는 않고, 제 배번을 적고 배번의 사진을 찍어둡니다. 50km 대회에서는 이 코스가 가장 난코스로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여기 있었던 것 같네요. 처음 Hidden CP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 쯤에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전에 참여했던 대회와 비교해서 조금 아쉬웠던 것 하나는, 공식 CP가 아니면 물 보충할 곳도 없었다는 점이었네요. 제가 챙겨간 물병이 생각보다 좀 작았는지, 마지막 코스에서는 중간에 물을 다 마셔 버렸거든요. 그 전 대회는 CP가 아닌 곳에도 물을 보충할 수 있는 곳이 한 두 군데 쯤 더 있었던 것 같아서요. 이건 대회 준비가 부족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힘들다 보니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경주로

코스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인왕산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하여, 북한산 둘레길 세 구간 (아마 7, 8, 9)을 돌고 북한산을 올라서 대동문을 찍고 내려온 다음에 다시 북한산 둘레길 세 구간 (1, 2, 3으로 기억)을 거쳐서 인왕산을 다시 찍고 시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공식적인 기록 측정은 인왕산을 내려온 직후라서 대략 48km 정도이고, 시청까지 돌아오면 49.7km가 되네요.

서울을 달린다라는 컨셉으로 서울의 매력을 보여주겠다고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매력을 나름 잘 보여준 코스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인왕산을 오르내릴 때는 바로 옆으로 성곽이 이어져 있고, 북한산과 그 둘레길도 — 계단이 오히려 불편하긴 했지만 — 여러 사람이 걷거나 뛰기 편하면서도 나름 우거져 있어서 아마 딱 그 구간만 도는 것이었다면 경치도 좀더 잘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높은 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때때로 커다란 빌딩의 숲이 우거지듯 모여 있거나, 또 어떤 곳은 키 낮은 집들이 산에 안기듯이 둘러쌓여 있어서 보는 맛도 있었어요.


딱 하나 마음에 안들었던 것은 인왕산에서 내려올 때쯤 되니 광화문 일대에서부터 마침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라는 것. 제가 여러모로 마음에 안들어하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마침 좋은 산에 있는데, 그런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니 더 마음에 안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산을 내려와서 보니 사람은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고, 이런저런 방송장비에서 들리는 소리가 너무 크네요.

마침

각설하고, 이미 너무 지친 상태였기에 마지막에 인왕산 정상을 오르는 길이 정말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북한산 대동문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뛰지도 못했어요. 마냥 걷기만 했던 것 같고. 그래서 기록을 보니 평균 시속이 딱 4km 정도네요. 인왕산을 마지막으로 오를 때는 성곽길을 따라 올랐는데, 계단의 높낮이와 간격이 제각각이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이런 애매한 계단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오는 것이 더 힘들어요.

그래도 내리막이 나오면
‘아, 이제 이 길이 끝나면 나도 끝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안심은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내려오다보니 문득 계측 장비를 든 두 분이 눈 앞에 보이고, 멀리서부터 벌써 박수를 열심히 쳐주십니다. 너무 지쳐서 걸어가고 싶은데, 저멀리서부터 박수를 쳐주시니 그냥 걷기가 너무 민망해서 마지막엔 또 몇 걸음 다시 뛰어 보았네요. 이렇게 인왕산을 내려오면서 공식 계측은 끝났고, 시청까지는 편히 걸어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시청까지의 코스마크가 제대로 되어 있지가 않네요. 올 때는 분명 정동길을 거쳐서 왔는데, 그 쪽 방향으로 안내하는 코스마크가 없어서 그냥 지도앱을 켜서 시청으로 찾아갔네요. 아마 정규코스는 아닌 것같은데, 거리는 비슷했을 겁니다. 오히려 조금 먼 것 같았어요. 공식 마지막 계측이 12시간 5분 정도, 시청에서의 기록은 12시간 34분이 나왔습니다. 북한산 중간에 길을 놓쳐서 잠시 헤맸는데, 그거 아니었으면 12시간 안에는 들어왔겠죠?

처음 피니시 라인을 들어올 때, 다른 선수들과 조금 다른 방향에서 들어오다보니 리본 들고 계시던 분이 저를 놓쳤어요. 내가 터덜터덜 걸어들어오니, 문득 저보고 혹시 완주 못하셨어요? 하고 묻더라구요.

“아니요?”

라고 말했더니,

“아이고, 너무 쿨하게 들어오셔서 완주하신게 아니신 줄 알았어요. 완주 사진 찍어드릴테니 얼른 다시 뛰면서 들어오세요.”

라고 말씀해주시네요. 그 와중에 사진 찍어주시던 여자 분 두분도 얼른 오셔서 마지막에 열심히 뛰어 들어오는 모습 연출해서 사진 찍었습니다. 이렇게 챙겨주니 문득 고마웠어요. (그런데 왜 정작 그 사진은 찾을 수 없을까요)

완주 기념품을 나눠주는 곳에서 다시 한 번 장비검사를 하고, 완주 기념품인 메달과 노스페이스 맨투맨 티를 받았습니다. 맡겨놨던 가방을 받아서 다시 옷을 갈아입고, 받은 식권으로 밥을 먹었네요. 식당 사장님이 원래 이런 데 관심이 많으신가봐요. 이번 경기 코스 짤 때도 나름 관여한 것 같고, 경기 마치고 온 사람들에게 무척 친절하시게, 샤워 안했으면 안에 들어가서 샤워하고 오라고 배려해주시네요. 전 귀찮아서 패스.

뛰고 난 당일도 몸이 뻐근하긴 했는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걷는 것도 힘들정도이네요. 그래도 거실에 완주 선물을 펼쳐 놓고 보니 뿌듯한 기분이 듭니다.



짧은 감상

이제 겨우 세 번 째 나온 트레일러닝 대회이긴하지만, 아직까지는 매번의 달리기가 새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번 똑같은 것 하나는 출발하고 30분이면 왜 나왔나 후회가 든다는 거에요. 그래도 끝은 생각도 하지말고 지금 이 오르막만 오르자, 이 내리막만 버티자 생각하고 가다보면 어떻게든 완주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년에 비해 운동을 안했다는 것이 온몸으로 와닿는 운동이기도 하구요. 달린다기 보다는 걷는 수준에도 못 미치긴 하지만, 그래도 길을 밀어낼 때의 기분뿐만 아니라, 끝나고 나서 꽤 오랫동안 남는 성취감이 매력인 듯 합니다.

아쉬운 건, 제 사진을 남기기가 쉽지 않다는 것. 셀카를 찍을 생각은 거의 들지도 않고, 단지 달리다 보면 작가님들이 요소마다 나오셔서 사진을 찍어주시는데, 지난 번 대회도 그렇고, 찍힌 기억은 여러 번 있는데, 좀체 업로드되는 사진은 잘 없네요. 지난 대회에서는 첫 대회에서만 한 장 건졌는데, 이번 대회도 아직까지는 한 장 밖에는 찾지 못했습니다. 뭐 아쉽지만 없으면 하는 수 없죠. (이미 2주 째이지만 제 사진은 결국 한 장뿐이네요 ㅜㅠ)

다음에는 꼭 한 번 제주에서 대회를 나가 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한라산 어귀를 달릴테니 서울보다도 훨씬 힘들겠지만, 최근 제주에 가본 기억이 참 좋았거든요. 어느 대회가 되었든 몸관리 잘해서 다음 대회는 꼭 기록을 단축해 보렵니다.

Ad Astra

영화에 대한 이야기다보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처음으로 출연한 SF 영화라는 광고문구로 인스타그램에서 영화를 처음 접했다. 그 광고에서는 영화의 끝에 충격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던 것 같다.

SF, 브래드 피트, 충격적인 결말.

재미없다고 말하기는 또 애매한 영화이지만, 최소한 충격적인 결말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오히려 이렇게 평범하고 무난한게 마무리된다는 것이 충격이라면 충격이랄까.

이야기의 시작

영화는 가까운 미래를 다루고 있다. 거기서 인류는 달과 태양계 안의 가까운 행성 — 화성 — 까지는 진출해 있고, 어떤 개척자는 저 멀리, 해왕성까지에도 발을 디뎠다. (착륙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주인공 — 로이 맥브라이드 — 이 일하는 낮은 궤도의 우주 안테나에서 갑작스래 고전압이 흐르며 큰 사고 발생한다. 알고 보니 이 사고는 전 지구적으로 발생하였는데, 진원지는 바로 해왕성이다. 그곳에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찾아 나섰던 로이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으며, 무언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 사고는 로이의 아버지가 타고 나선 우주선의 동력원이었던 반물질이 불안정해져서 나타난 것으로 방치하면 전 지구적인, 인류의 크나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로이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하여, 아직 작동하는 장거리 통신장비가 있는 화성으로 향한다.

관찰자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보다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내도 영화를 보는 것이 마치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하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나도 영화에 빠져든다거나, 영화의 관객이 된 것이 아니라 사건의 관찰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영화는 시종일관 로이에게 집중한다. 그래서 영화가 기본적으로는 로이를 관찰하는 3인칭 시점에서 진행되긴 하지만, 로이가 잡히지 않는 화면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도 될 정도이고, 때때로 로이의 시선에서 다른 사람을 비추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연출은 영화 안에서 내가 로이의 시선으로 다른 이를 바라보기보다는 로이의 심리를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처럼 작동한다고 느껴진다.

통상 다른 영화에서라면 더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법한, 긴장감이 흐르고 깜짝 놀랄 일이 생기는 상황에서도, 감독은 시간을 정직하게 그대로 흐르게 하면서 그냥 이런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어느샌가 영화를 보면서 긴박감 넘치는 사건에 놀라거나 몰입하기보다, 저 상황 자체를 곰곰이 따지면서 바라보게 된다.

‘저럴 수 밖에 없었을까,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혹시 다르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흐르는 강물처럼

영화가 시작하고 시간이 어느정도 흐르고 나니, 문득 흐르는 강물처럼이 생각났다. 어렸을 때 내가 무척 좋아했던 영화였다. 그 영화의 브래드 피트도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헌신했다. 따라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막연히 멋있어 보이는 사람.

그 영화에서도 등장 인물 각각의 목적과 서사는 있었지만, 영화를 관통하는 커다락 목표, 어떤 대의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평범하지는 않은 어떤 가족의 분투기였고, 특히 유별난 한 아들은 분투의 끝에 더욱 유별난 죽음을 맞았던 그래서 주변 어느 사람도 잊을 수 없게된 그런 이야기였다.

이 영화도 그러하다. 어쩌면 평범함이란 것에서 아주 크게 벗어나는 가족은 아니었을지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꿈은 그런 작은 그릇에 담기기에는 너무 원대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이 갈 수 있는 우주의 끝으로 향했고, 어째서인지 그 아들은 감정을 잘 내보이지 않는 목석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영화의 시작을 보면 아마 이혼을 앞두고 있었던 것 같다. 별일없이 지나갔다면 아마 이혼하고, 지구 바로 바깥의 가까운 우주에서 군인으로서의 삶을 평범하게 해쳐 나갔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처럼과 다른 점은 아버지 — 가 일으킨 사고 — 가 로이가 여행을 시작하게 한 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아마 군의 상층부에서 로이를 콕 집어서 가라고 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관련된 일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떠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이는 출발했고, 여행을 이어나갈 자신의 이유를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귀향

여행이라는 것은 결국 결핍이 있기에 떠난 것이고, 돌아올 때는 적든 많든 무언가가 채워졌기에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끝없이 여행을 떠나거나,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결핍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착각해서 결핍되지 않은 것을 밀어넣거나, 채우면 채울 수록 구멍이 더 넓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로이는 불가능해 보였던 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아무래도 길었던 여행에서 감정을 다시 채워 온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버지가 빼앗아 갔던 것을 힘겹게 추격해서 마침내 되찾아 왔거나. 예전 어디선가 모든 남자는 결국 아버지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로이는 영화의 끝에서 마침내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아버지일 수록 극복의 과정은 힘이 들고, 극복해내지 못한 자식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의 위기를 겪는다.

아무튼 마침내 로이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화의 끝에서 보이는 로이는 영화가 시작할 때처럼 메말라 있지 않다. 관계를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으로 보이고, 상대의 가치에 대해서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삶이 다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단지, 로이의 깨달음을 위해 어처구니 없이 죽어간 화성발 우주선의 승무원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Now You See Me 1편과 2편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니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술을 이용해서 크게 한탕한다는 소재에 이끌려서 한참 전부터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다가, 단숨에 1편과 2편을 동시에 봤다. 전체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볼거리가 매우 화려한데, 나름의 반전도 있는 전체 관람가 쯤 되는 유쾌한 액션영화.

1편이 나오고 시간이 제법 흐른 뒤에 2편이 나왔는데, 그래서그런지는 몰라도 두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평도 좀 갈린다.

1편

1편에서 영화는 실력은 좋지만 좋은 무대에 설 기회는 없었던 네 명의 마술사가 각자 한 장의 카드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이 카드는 일종의 초대장으로 넷은 한 자리에 모이고, 그곳에서 설계도처럼 보이는 입체 영상을 발견하면서 화면이 바뀐다.

네 명의 마술사는 그 이후 팀을 이뤄서 다 같이 마술쇼를 진행한다. 마술쇼는 트릭을 이용해서 은행을 털거나, 계좌를 해킹하는 것 따위다. 당연히 수사당국이 나설 수 밖에 없고, 프랑스(털린 은행이 프랑스에 소재해 있다)에서 온 인터폴과 FBI의 수사관이 팀을 이뤄서 마술사를 추적한다.

수사관은 당연히 마술에 익숙하지 않고, 관객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마술을 해설해줄 수수께끼의 남자가 수사관과도 거리를 두고 마술사를 뒤 쫓는다.

화려한 볼거리

기본적으로 마술이라는 것은 관객 주의를 다른 곳으로 빼앗고, 그 틈에 트릭을 빠르게 해치우는 것이다. 주의를 돌려야 하다보니, 마술사들이 보여주는 쇼맨십은 대단하다. 더구나 공을 들여 만들어지는 영화이다보니 영화에서 비쳐지는 볼거리는 더욱 화려하다.

영화 중간에 마술사들이 수사관에게 한 번 거의 추격 당 — 하는 척 — 하면서 마크 러팔로를 포함한 수사인력과 몸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에도 마술의 트릭으로 보이는 것을 사용하면서 꽤 화려한 액션 장면을 보여준다.

그럴 듯한 설명

자잘한 트릭은 설명되지 않는다. 수갑을 다른 사람 팔목에 채워버리고, 상대가 가져온 콜라병 안에 열쇠를 넣는 것은 그러려니 해도, 그 외에 택도 없는 곳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감이 잘 안온다. 더구나, 메릿의 최면술은 결과만 놓고보면 무시무시한 기술인데도 너무 남발하는 느낌마저 있다.

그래도 큰 기술에 대해서는 모건 프리먼이 네 명의 마술사 — Four Horsemen — 를 뒤 쫓으면서, 그 마술이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인지 수사관에게 친절히 설명해준다. 모건 프리먼 — 새디어스 — 마술의 속임수를 까발리는 일종의 저널리스트로 영화 내내 마술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마술의 속임수를 논리적으로 관객에게 설득하는 역할을 해준다.

아쉬운 결말

영화가 진행되어 가는 것을 보면, 네 명의 마술사는 마치 활빈당처럼 보인다. 처음 시작할 때 미스터리한 카드를 받고 팀을 이룬 것이니 더 큰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프랑스인 인터폴이 마술사들의 비밀결사인 디 아이 The Eye에 대해서도 떡밥을 흘리기 때문에 이야기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서 대단한 결말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알게되는 것은 어렸을 때 마술사인 아버지를 잃은 어린 소년이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 보상문제에 관여된 사람/조직에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끝난다. 많은 사람을 열광에 빠트렸고, 네 명의 마술사가 인생을 걸게 한 이유가 단지 개인의 복수 때문이었던 것 뿐이다.

물론 마지막에 디 아이와 관련된 비밀의 장소로 들어가는 듯한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정말 디 아이에 들어갔는지는 상상에 맡길 수 밖에

2편

2편은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보기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중국계로 보이는 감독에 척 봐도 중국 자본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는 프리뷰.
영화는 1편에서 큰 사건을 일으킨 포 호스멘이 여전히 숨어살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딜런은 이제는 포 호스멘에 대놓고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되어 있다.

화려한 볼거리?

2편에서도 볼거리는 여전히 화려하다. 멋진 장면이 연이어나오고, 액션도 무난하다. 그렇지만 그게 끝. 그냥 성룡 영화처럼 기발한 아이템을 사용한 액션 영화처럼 보일 뿐, 마술을 활용한 볼거리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특히 악당에게 된통 당하고 나서 최후의 반격을 하는데, 여기 모여서 보이는 마술은 영화니까 연출할 수 있는 것이지 실제로 저런 길바닥에 갑자기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인가 싶은 짓을 한다.

가장 이해가 가지 않았던 장면은 연구소에 칩을 훔치러 들어가서, 네 사람이 서로 칩이 붙은 카드를 주고 받으면서 몸을 뒤지는 경비 요원들의 시선을 속이는 장면이다. 분명 카드를 손에 들고 몸 검사를 끝낸 사람이 이제 검사를 시작하는 일행에게 몰래 카드를 날려주고, 그 사람은 카드를 들고 위태롭게 몸 수색을 받는다. 그리고 자기 차례가 끝나면, 다시 아직 수색을 받지않은 자에게 카드를 넘긴다. 뭐하는 짓인지…

사라진 설명

1편에 이어 다시 세상으로 나온 세디어스는 더 이상 트릭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고, 갑자기 본인도 마술을 펼치기도 하는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된다.

영화의 주인공인 딜런 로즈와 수 싸움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에 더 이상 트릭에 대해서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래도 가장 마지막에 비행기 트릭에 대해서는 포 호스멘이 직접 설명을 해주는데, 여기서 문제는 영화 속의 관객이 더 이상 마술쇼의 관객이 아니라는 점이다.

2편에서는 적극적으로 영화를 보는 외부의 관객을 마술의 관객으로 받아들인다. 풀어서 말하자면, 마지막 트릭은 영화속의 관객은 어떻게 트릭이 진행되고 어떻게 모두가 멋지게 속아 넘어갔는지 알 도리가 없다. 1편에서처럼 마술에 참여할 수 없을뿐 아니라 마술의 과정 자체를 보지 못하고 결과로 짠하고 나타난 것만 보며 환호할 뿐이다. 그러니 마지막 마술에 대한 설명은 사실 영화 속 관객을 위한 설명이 아니라, 영화 밖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위한 설명이 되는 것이다.

영화에 중국 자본이 들어간다는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더 들어가면 더 화려한 효과를 쓰고, 큰 스케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테니까. 문제는 중국돈이 들어가면 꼭 그 티를 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비티처럼 우주정거장에 붙은 중국의 국기를 보여주거나 하는 것은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데, 범죄의 거물인 백인이 왜 굳이 마카오에 숨어살아야하며, 주인공 일행은 왜 최면을 당한 채로 그 먼거리를 옮겨가야 했나.

딜런 로즈의 아버지 — 라이오넬 슈라이크 — 는 마술에 사용할 금고의 시제품을 왜 굳이 마카오에서 주문해야 했을까. ( 그 가게의 모자가 디 아이의 멤버라고는 하지만, 설마 그런 대단한 결사에 속한 장인이 마카오의 할머니뿐이진 않을 것이다)

산으로 가는 이야기

그러다보니 영화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설득력이 많이 약하다. 영화 초반에는 젊은 빌런이 마술사 네 명을 납치해와서 특별한 해킹 시스템을 훔쳐오게 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본인의 것을 훔쳐서 본인에게 다시 가져오게 만드는 것이었고, 1편에서 포 호스멘에게 호되게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목적이 크다.

그런데, 복수를 하려고 했다면, 굳이 납치해와서 이런저런 어려운 심부름을 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훨씬 쉬운 방법이 하나둘이 아니다. 결국은 포 호스멘이 위기를 딛고 단단하게 결속한다는 동화를 써내기 위한 억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설명될 수 없는 기술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최면이다.

네 명의 마술사가 영문도 모르고 마카오로 끌려가는 것도 최면에 의한 것이고, 영화의 고비마다 위기를 고조시키거나, 문제를 풀어내는 것은 모두 최면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최면이란 것은 — 특히 영화에서 보여지기로는 — 그냥 툭치면서 몇 마디 내뱉으면 걸리고 마는 것이다보니, 영화의 긴장감을 없애버린다. “아, 뭐 저러다 최면거나보지머”

마무리

따분하고, 뭘 할지 모르겠다면 한 번 보기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은 영화다. 1편은 나름 퍼즐같은 재미가 있었고, 2편도 1편에서의 기대를 접으면, 나름 화려한 액션 영화 느낌은 난다.

하지만, 이야기의 얼개에 대해서도 마술의 교묘한 트릭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는 말자.

내가 쓰는 만년필

시작

어느 때인가 Graf von Faber-Castel에서 나온 나무로 만들어진 만년필을 보고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편하게 살만한 가격은 아니어서 그냥 머리 한 켠에 담아두기만 했었는데, 그러다 누나가 생일 선물을 보내준다고 해서 혹시 그라폰파버카스텔의 만년필을 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누나가 사준 것은 그냥 파버카스텔의 만년필이었으나 그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기에 열심히 쓰려고 했다.

쓰려고 했다는 것은, 잘 쓸 수는 없었다는 거다. 잉크를 채우는 불편함 같은 것은 상관없었으나, 만년필을 쓰려고만 하면 펜의 잉크가 말라서 힘껏 흔들어 주거나 잉크가 든 튜브의 밸브를 살짝 돌려서 펜촉 쪽으로 잉크를 흘려주거나, 물에 한 번 펜촉을 적셔줘야 했다. 회의하면서 펜을 꺼내면 막상 안나오는 일이 많아서 점점 덜쓰게 되었다.

새 펜

그러다 미니언을 좋아하는 아내의 친구에게서 저렴한 만년필을 얻게되었다. 가볍게 써봤는데, 의외로 적당히 잘 나왔다. 펜촉이 너무 거칠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파버카스텔의 만년필처럼 잉크가 마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좀 쓰다보니 좋은 만년필에 약간 욕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것은 필요없고… 그래서 아마존을 조금 뒤져보니 LAMY의 Ruthenium이라는 이름의 펜이 보였다.

라미는 플라스틱이 많아서 좀 망설였는데, 금속 계통인 듯하여 마음에 들어 Extra Fine 펜촉으로 주문했다. 그러고 얼마 뒤에 회사에서 경력직 입사기념으로 또 EF 펜촉의 라미 만년필을 선물해줬다. 이 녀석은 짙은 회색의 플라스틱인 대신에 내 이름을 영문으로 새겨줬다. 둘 다 잉크가 마르는 일 없이 잘 써져서 요새는 이 두녀석을 들고 다니며 주력으로 사용한다.

비교

위에서 부터 차례대로 파버카스텔의 만년필, 저렴한 미니언 만년필, 아마존에서 구입한 라미와 회사에서 준 라미이다. 미니언의 경우에는 잉크가 거의 닳았는데, 잉크 카트리지를 못 찾아서 그냥 썼기에 글자가 좀 끊긴 면이 있다. 파버카스텔과 미국 라미의 EF 펜촉은 내 기준에서는 충분히 가늘어서 글씨를 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진 상에서는 파버카스텔이 더 굵어 보이는데, 잠깐 사이에 잉크가 말라서 또 물에 한 번 담궈서 그렇다. 계속해서 쓰는 중에는 오히려 좀더 가는 느낌이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너무 가늘다 보니 펜이 마르는게 아닌가 싶은 정도여서, 집에 두고 가끔 스케치 연습할 때 사용한다. 가끔이다보니 매번 펜촉에 물을 뭍혀서 쓰게된다. 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획이 상당히 날카롭고 가늘게 써진다.

라미는 둘 다 EF 펜촉임에도 굵기가 다르다. 회사에서 준 것은 아무래도 한국에 들어온 그대로일텐데, 더 굵다. 한글처럼 획이 끊기는 글씨체에는 좀더 가는게 맞을텐데 왜 더 굵게 들어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밖에는 크게 다른 것은 없다. 종이에 쓸 때도 만년필 특유의 사각사각하는 느낌 외에 거칠게 종이를 긁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용

위에도 말했듯이 파버카스텔 만년필은 집에서 한 번씩 그림 연습 — 이라고 해봐야 한 달에 한 범도 잘 안그려서 실력은 도무지 늘지 않는다 — 할 때 쓰는 편이다. 다른 도구에 비해 더 편하거나 쓸만한 효과 같은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이에 선을 그을 때의 그 느낌이 좋다.

라미는 펜 주머니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일상적인 필기에 사용한다. 주로 쓰는 것은 좀더 가는 촉의 라미이고, 플라스틱 라미에는 파란 잉크를 담아서 쓸 예정이다.

미니언 만년필은 지금은 쓰지 않는다. 종이 위에 선을 긋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아서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메일, 다시 기본으로

계기

지금 찾아보니, 2016년에 Airmail에 대한 글을 썼다. 그 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테니, 메일 클라이언트로 에어메일을 써온 것이 벌써 3년은 된 것 같다. 그 기능을 특별히 잘 활용해온 것은 아니지만 쓰면서 크게 불편한 점도 없었기에 굳이 바꾸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떠한 이유로 과거의 메일을 검색해볼 필요가 생겼다. 에어메일에서 검색을 해봐도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해당되는 폴더로 가서 하나하나 찾아봐도 특정 시점이 되면 더 이상 메일이 불러와지지도 않았다. 그 순간에는 모바일의 한계려니 하고, 노트북에서 Gmail로 접속해들어가 메일을 찾아냈다.

조금 지나서 생각해보니, 꼭 그렇게 검색이 안될 것 같지는 않아서 당장 몇개 클라이언트를 시험해봤다. 아웃룩은 에어메일과 검색결과가 다를 바 없었지만, Readdle에서 만든 Spark는 내가 원하는 검색결과를 제대로 보여주는 것을 확인하고, Spark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

Spark를 쓰다가 문득 생각났다. 기본 메일앱에서는 결과가 어떻게 보여질까?

그래서 한 번 테스트해보니 Spark처럼 제대로된 검색 결과를 보여준다.

예전에는

예전에 기본 메일앱을 쓰지 않고, 외부 개발자가 만든 메일앱을 기웃거린 이유는 당연히 기본앱에서 불편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1. 나는 인박스로 들어온 메일을 확인한 다음, 필요없는 것은 삭제하고 보관해둘만한 것은 보관소로 보낸다 (Archive) 기본 메일앱은 둘 중 하나만 하기는 쉽지만 두 가지를 다 하려면 번거로워진다.
  2. 특히 예전에는 종종 받은 메일을 OmniFocus나 Things같은 앱으로 보내거나, 에버노트 등에 저장해뒀다. Airmail에서는 미리 Action을 지정해두고 한 번 스와이프로 메일을 다른 앱에 보내고 보관까지 할 수 있었다. 기본 메일앱에서는 내용 전체를 복사한 다음에 해당 앱으로 가서 붙여넣기 하는 수 밖에는 없었다.
  3. 그리고 조금 더 나은 사용자화. 기본 메일앱에 비해서 내가 사용하기 조금 더 편하게 메뉴나 스와이프 액션을 바꿔둘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Airmail이 뛰어났다.

이런 이유로 처음 에어메일이 출시되었을 때 구입했고, 특별히 문제가 없으면 (할일 앱을 제외하고는) 그냥 정착하는 편이어서 오랫동안 에어메일을 써왔다. 그러다가 앞서 쓴 것처럼 검색결과에서 의문을 느끼고 다른 앱을 둘러보기 시작한 것이다.

난 헤비유저는 아니어서

사실 나는 그다지 헤비유저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편이어서, 에어메일의 다채로운 기능도 잘 사용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렇게 열심히 쓸일이 없었고, 몇 가지 편리한 기능만 골라서 써왔다. 그나마도 최근들어서는 더 적게 쓰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막상 기본 메일앱을 사용했을 때, 크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예전에 불편하게 생각했던 요소가 사실 거의 그대로 남아있긴 했지만, 이제는 그게 그렇게 핵심적인 요소로 남아 있지 않게되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iOS 13(아이패드에는 iPADOS 13)을 올려서 사용해보고 있는데, 기존에 기본 메일앱을 쓰면서 불편했던 사항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여전히 메일 전체를 다른 앱으로 한 번에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스와이프를 통해서 삭제/아카이브를 쉽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메일 내용을 확인하다가 답장 버튼을 누르면 아래와 같이 답장/전달에 더해서 삭제, 아카이브, 정크로 보내기 등이 생긴다.

그래서

아이폰에서는 다른 메일 앱은 모두 지워버리고 기본 앱만 사용하고 있다. 아이패드에서는 비교를 위해서, 또, iOS 13의 메일앱이 아직 불안정하여, 여전히 스파크와 에어매일을 깔아두고는 있지만 곧 지워버릴 생각이다.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굳이 복잡해야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 다음으로는 할일 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OmniFocus와 Things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과연 내가 할 일이 그렇게 복잡할까. 그냥 미리알림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iOS 13의 미리알림은 그 전에 아쉬웠던 사항들이 다수 해소가 되었다.

Beoplay E8, 1년 5개월

영수증을 찾아보니 내가 E8을 주문한 날짜가 2017년 크리스마스 이브이다. 휴일 제외하고 사나흘 정도 지나서 받았을테니, 이제 사용한지 1년 5개월 정도 되었다. 지금 6월이 다 지나가는 와중에 5개월이라고 한 것은 5월 중순 수리를 맡겼기 때문이고, 얼마 전에 교환품을 받은 김에 간단히 그간 쓰면서 새로 느끼게 된 것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수리를 맡기고 교체품을 받기까지 거의 한 달 정도가 걸렸다. 그 동안 번들 이어팟을 사용했는데, 줄 없는 이어폰을 사용하다가 갑자기 전화기와 내 귀가 줄로 연결되고 보니 상당히 불편했다. 역시 안 쓸 때는 몰랐지만, 한 번 알게되면 다시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 음질에 대해서는 여전히 불만이 없다. 사실 특별히 더 좋다는 생각도 잘 들지는 않았었는데, 막상 수리를 맡기고 이어팟을 자주 듣다보니 소리가 좀더 충실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했다. 어쩌면 오픈형과 인이어 타입의 차이인지도 모르겠다.
  • 같은 맥락에서 인이어가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팟을 끼면 주변 소음이 너무 크게 들려서 자주 소리크기를 지나칠 정도로 높여야했다. 그러고서도 음악이나 팓캐스트가 잘 안들릴 때가 많았다.
  • 1년이 넘게 사용했지만, E8의 터치 조작은 여전히 적응이 잘 되지 않는다. 두 번 연속의 터치를 거의 대부분 한 번의 터치로 인식한다. 그래서 다음곡으로 넘기기를 할 때, 자주 음악이 정지된다.
  • 이전 곡으로 넘기기는 왼쪽 유닛을 두 번 연속 탭해주는 것이다. 당연히 한 번에 인식하는 경우가 잘 없는데, 왼쪽 유닛을 한 번 탭하면 트랜스패런시모드가 작동해서 갑자기 외부 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전으로 넘기는 일이 많지는 않은데, 해야할 때는 그냥 전화기에서 조작한다.
  • E8의 터치부를 세 번 연속으로 탭하면 시리를 호출한다. 일단 세 번 연속으로 탭하는 것부터가 너무 어렵다. 또, 그렇게 부르면 재생중이던 음악이나 팓캐스트가 끊기기도 하고, 시간도 꽤 길게 걸리는 편이라 잘 사용하지 않는다.
  • 탭할 때 나 스스로 체득한 그나마의 팁이라면, 검지손가락으로 유닛을 받쳐주고, 엄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유닛 위치를 기준으로 잡을 수가 있어서 탭이 제대로 될 확률이 그나마 높다.
  • 몇 번 E8을 착용하고 통화를 시도했다. 대부분 내 목소리보다 소음이 너무 크게 들린다고 하기 때문에, E8을 끼고 있다가 전화가 오면 (혹은 전화를 걸어야하면) 자연스레 한 쪽을 빼서 손에 들고 그 쪽 귀에 전화기를 가져다댄다.
  • 유닛을 빼야할 일이 있으면, 주로 오른쪽 유닛을 뺀다. 오른쪽이 주 유닛이어서 오른쪽을 빼야 음악이 멈추기 때문이다.
  • 1년 반에 가까워오다보니 재생가능 시간이 가파르게 줄어 들었다. 그래도 2시간 이상 유지가 되었는데, 어느순간 시간이 줄어들더니 2주 정도만에 1시간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아래에 다시 쓰겠지만, 메일로 문의하고 AS를 맡겼더니, 기기 문제가 맞다고 판정하고 새로운 유닛으로 교환해 주었다.
  • 한 번에 아주 오랫동안 음악을 듣는 편은 아니어서, 4시간의 배터리 타임은 불편함이 없었다. 충전도 회사 도착해서 그냥 끼워두는 편이라 특별히 귀찮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가방 없이 이어폰을 들고 나갈 때, 차징 케이스의 부피는 은근히 불편하다.
  • 운동할 때, (헬스장에서나 달리기 할 때나) E8을 착용한다. 수리를 맡긴 동안에는 운동할 때 아예 음악을 듣지 않았다. 인이어 타입이라서 그런지 귀에 잘 고정되어 빠지지 않는다. 예전, 이어팟을 귀에 꼽고 달리기를 할 때는 유닛이 자꾸 흘러내려서 여간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무선 이어폰(백비트 핏/H5 → E8)을 사용하면서부터는 그런 불편함에서는 해방되었다. B&O에서는 E8이 Sweat-Proof라고 하는데, 땀에 젖어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 물론 운동하면서 땀을 많이 흘리고 나면, 폼팁이 땀에 잔뜩 젖어버릴 때가 있다.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바로 다시 착용하는 것은 좀 찝찝하긴 하다. 귀도 축축하고.

수리 후기

위에 잠깐 썼다시피 2시간 정도 듣고나서도 50% 정도의 배터리가 남아있던 E8이 어느 순간 배터리가 줄기 시작하더니, 2주가 채 지나지 않아서 1시간도 가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러면 중간에 충전을 해주더라도 달리기나 다른 운동 중에 음악이 끊겨버리고, 출,퇴근 시간도 간당간당해져서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이메일로 문의했더니, 유닛을 초기화해보고, 펌웨어를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 해보라는 답이 왔다. 펌웨어는 이미 최신이어서 유닛을 초기화해봤더니, 그래도 겨우 1시간 살짝 넘는 수준. 그래서 B&O 홈페이지에서 바로 AS를 신청했다. 신청과정에서 구매 증빙을 올리도록 되어있어서 영수증을 겨우 찾아서 올리고, 문제가 무엇인지 질문에 맞춰서 작성했다.

접수를 끝내고 나면, 이메일로 페덱스의 통관서류가 오고, 페덱스 담당자와 따로 연락해서 예약을 잡도록 한다. 페덱스로 물건을 보낼 때는, 당연히 제품(유닛과 차징케이스)과 부속물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어팁은 소모품이어서 필요 없지만, 케이블은 반드시 넣어서 보내야한다.

물건을 보내고 나면 아래처럼, 배송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틀만에 물건이 홍콩에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 깜깜무소식이라는 것. 2주 정도 지난 다음에 문의해봤는데, 한 편에서는 물건 확인해서 상태 업데이트되면 알려준다고 하고, 또 다른 편에서는 물건 못 받았으니, 어서 보내라고 한다. 내 물건 어디 있냐고 전화까지하고, 메일로 한두번 실랑이를 하고서야 4주 정도 지났을 때, 이어폰 검사가 다 끝났으니, 곧 이어폰을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고는 또 이제 검사를 시작했다는 메일을 받기는 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서 검사가 끝났고, 검사결과 제품 이상이 맞아서 새로운 제품을 보내주겠다는 메일을 받았다.


다음 주로 바뀌어야 물건을 받을 줄 알았는데, 이 처럼 물건 발송 후 이틀만에 이어폰을 받을 수 있었다. 물건을 다시 받고 나서 생활 패턴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갔다.

하나 더, 나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서 홍콩에 직접 수리를 의뢰했는데, 물건을 다시 보내주면서 이메일을 통해 워런티 문서(PDF)를 다시 보내주었다. 내가 물건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날짜를 기준으로 다시 보증기간을 2년 — 2021년 6월 26일까지 — 늘려준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교환받은 사람은 따로 얘기를 못 들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직접 교환이 더 유리할 수 있겠다.

나는 원래는 교환품을 받으면, 미개봉 새제품 정도로 팔고 다른 것을 써볼까 했는데, 워런티가 연장된 것을 보고 그냥 현 제품을 주욱 쓰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