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Fish: 아버지의 환상

나이먹고 보면 과장이 5할은 넘어가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어렸을 적에는 아버지가 젊으셨을 적 겪으셨다는 경험담 하나하나를 빨려들어갈 듯 집중해서 들었던 적도 있지 않았었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많은 일들이 아버지 말씀처럼 짠하고 풀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것 같다. 많이 시도해보고 잘 안되니까 아마 꽤 많은 과장이 아버지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으려니 생각해 버리곤 한다.

그러다보니, 요즘에는… 으레 이 정도는 과장이시겠거니 하고 걸러듣게 된다. 그리고 예전에 하셨던 이야기를 꽤 자주 반복하신 다는 것을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가끔은 반농담삼아 아버지 지금 하신 말씀 두어번만 더 하시면 백번은 채울 것같다고 말씀드린다.

영화 속의 아들

내가 한 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이 영화의 젋은 아들은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 아 물론, 조금 더 과장된 측면은 있다. 영화니까. 사실 우리아버지는 마녀를 보신 적 없으시고, 유령 마을로 모험을 떠나 보지는 않으셨다. 키가 몇 미터 쯤 되는 거인, 믿을 수 없이 커다란 물고기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신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 보니 오히려 주인공의 심정은 더 이해가 갔다. 어렸을 때 들었던 아버지의 환상적인 이야기는 나이먹은 자식에게는 그냥 우스갯소리일 뿐이니까. 결국 나이먹고 나면 “아버지는 왜 항상 농담만 늘어놓고 사실은 말해주지 않으실까.” 생각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아버지의 모험담임과 동시에 아버지의 진실을 찾아나서는 아들의 모험담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팀 버튼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서) 이 영화가 아버지가 겪을 모험의 진실을 향한 아들의 모험이고, 그래서 정말 큰 물고기를 찾았다 따위의 이야기인 줄알았다.

아버지의 모험

사실 따지고 보면 모험은 아버지 혼자 했다. 시대상으로 보면 아버지인 에드워드 블룸은 대략 1920년대말이나 30년대 초쯤 태어난 사람인 것 같다. 그가 어렸을 때는 아직 가까운 지역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는 시기였고, 약간의 신비 같은 것이 남아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젊어서 본인이 나고자란 마을을 거인과 함께 떠나서, 숲 속 깊이 숨겨진 신비로운 마을을 방문하고, 마침내는 사랑을 찾아서, 결혼한다. 결혼과 동시에 군대에 징집되어 죽을 위기를 넘기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아들의 입장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이 모험담은 어린 윌에게는 놀랍고 신기한 이야기였지만, 나이들은 아들에게는 도무지 사실에 대해서는 알려줄 생각없는 거짓말쟁이 이야기꾼의 허풍으로 들릴 뿐이다.

심지어 이 문제로 두 부자의 대화도 거의 단절되다시피한다. 사실 철없는 두 남자가 다시 연결될 계기를 찾아주는 것은 두 여자다. 아버지의 아내와 아들의 아내. 특히 아들의 프랑스인 아내는 (편견에 바탕한 것일 수도 있지만) 특유의 낭만주의적인 성향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그리고 아버지의 진실을 찾는 일에 거의 절망하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야기의 모든 부분이 거짓은 아니라는 귀뜸을 준다.

이야기

아버지의 모든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야기의 전체적인 얼개는 사실이다. 실제로 거인을 만났고, 유령마을을 방문했으며, 사랑을 찾기 위해 몇 년을 투자했고,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단지, 거인은 그렇게 거대한 사람인 것은 아니었고, 유령마을은 마을이름이 유령마을이었을 뿐 어떤 신비로운 환상의 장소는 아니었으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구해준 쌍둥이 자매는 정말 쌍둥이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저 그토록 환상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 뿐이다.

사실

아들인 윌은 환상적으로 덧칠해진 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약간씩의 사실의 조각을 찾고, 그걸 바탕으로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한다. 아버지의 모험은 그 자체로 멋진 이야기이다. 다만, 에드워드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조금 건조할 수 있는 부분들을 그냥 그대로 말해버리기엔 상상력이 너무 풍부했던 것 뿐인지도 모른다.

영화 마지막에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버지의 지인을 만나면서 비로소 윌은 에드워드의 환상과 화해한다. 병원에서 나이든 의사가 말해준대로, 사실 그대로는 너무 건조하니까.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거짓인 것을 몰라서 재미있어 하는 것은 아닌 것 처럼

화해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아버지는 마침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죽는다.
아버지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고, 마침내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죽는다. 그 이야기는 아들의 이야기. 아들이 전해준 그 이야기가 정말 에드워드 블룸이 어렸을 적 마녀의 유리눈에서 본 것인지, 아버지가 아직 젊었던 시절 아들에게 꾸며서 말해준 것인지, 아들이 꾸며낸 이야기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들이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이야기들을 한 자리에서 모두 만난다. 등장인물들이 아버지의 이야기처럼 과장된 것은 아니지만, 동화의 조금은 현실적인 버전으로 그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다.

이제 나의 이야기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른 여러 가족도 나의 경우와 많이 다르지는 않을거라 지레짐작하면서 아버지와의 약간의 거리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가끔 대화를 나누면 아버지가 내 이야기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신 것 아닌가 의심스러워 하면서, 정작 나 스스로도 아버지의 이야기를 마치 벽 너머로 듣듯이한다.

정작 생각해보면 나도 아버지도 부디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내가 먼저 정말 끝까지 제대로 들었다면 아마 아버지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셨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 중간에서 서로 거리를 두게 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아니라 서툰 말솜씨이지 않을까.

에드워드 블룸은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지만, 아들에게 맞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아마 그가 살아온 방식을 갑자기 바꿀 수 없었을 것이다. 윌 블룸은 신문사 기자로 나온다. 분명 실력있는 글쟁이였겠지만, 아버지처럼 세상을 이야기로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가 된 윌은 마침내 그냥 말이 아닌 이야기를 한다.

부산행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산행을 보았다.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지라, 한국에서 만든 좀비영화라는 것에 관심이 가기도 했고, 최근 개봉한 영화 중에서 꽤나 재미있는 축에 든다는 이야기도 들려서 보기로 했다. 몇몇 기사에서 지적한 변칙 개봉 문제나 다른 영화에 비해 상당히 높은 스크린 점유율을 생각하면 장삿속이 좀 뻔해 보여서 고민이 되기도 했으나, 일단 뭐든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 선택권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좀비 영화를 꽤 좋아하기는 하지만, CG가 들어가는 국내 영화들을 보면서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던 일들도 나름 없지 않아서 기대치는 한껏 낮추고 영화를 보았다. 결론적으로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은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 좀비영화를 보면서 아무리 잔인하고 무서운 장면이 나와도 특별히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그들과 나는 멀쩡할 때부터도 생김새가 상당히 다르고, 좀비가 되고 나면 도무지 있을 법한 존재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현실감이 더욱 떨어지기 때문이었는데, 정확하게 대칭되는 이유로 이 영화는 상당히 무섭게 느껴졌다.

우리가 오다가다 쉽게 만나는 그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내게 달려든다. 익숙한 모습들이 좀비가 되어 달려드는 모습은 생각보다 더 강한 현실감을 주었다. 게다가, 부산행에서는 좀비가 된다고 해서 모습이 극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사실 지금까지 봐온 좀비영화에서는 좀비가 되면 생각보다 빠르게 시체처럼 변한 모습을 보여주다보니, 내일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기차라는 상당히 제약되고 단선적인 공간이 배경이어서 어디 도망갈 데조차없는 사람들의 대응이나 심리상태도 충분히 납득이 갔고, 내 눈에는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흠잡을 곳 없어 보였다. 그 외에 배우들이 맡은 역할이나 주인공이 딸을 위해서 변해가는 모습은 한켠으로는 뻔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검증된 이야기 구조라는 생각도 든다.

좀비로 변한 사람들과의 대치를 폭력시위로 표현하고 경찰로 제압하는 모습이 중계되는 것은 이 사회의 단면을 잘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마지막에 단지 세 여성만 살아남아서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이 오히려 무언가 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론적으로는 영화 홍보 과정은 썩 마음에 안들지만, 더운 여름에 봐도 후회하지는 않을 잘 만든 영화라는 것.

참고로 부산행의 프리퀄인 애니메이션 서울역8월 18일에 개봉한다고 한다.

나는 전설이다. 영화와 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음

벌써 9년 전, 2007년에 영화가 처음 개봉했을 때, 바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일단, 좀비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고, 윌 스미스라는 배우도 어느 정도는 재미가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소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일단 영화를 먼저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소설을 찾아서 읽어보았는데, 소설을 찾아본 이유는 1. 원작소설이 있는 영화가 재미있으면, 왠만하면 소설도 읽어보자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2. 영화의 끝이 조금 애매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당시 영화에 조금 관심을 가졌다면 누구나 알겠지만, 영화에는 두 가지 엔딩이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윌 스미스가 죽고, 생존자가 백신을 들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윌 스미스가 살아서 그곳에 가는 것. (내가 본 것은 윌 스미스가 죽는 쪽이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이 인류를 위해서 매우 인상적인 — 충분히 전설적이라고 말할 법한 — 활약을 펼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런 경우에 본인이 “나는 전설이다.”하고 확신에 차서 말하지는 않는다. 과학자가 아직 제대로 임상을 거치지도 않은 백신을 손에 쥐고 “나는 전설이다”하고 외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색하다.

그러다가 소설을 읽어보면, 소설을 끝까지 읽어보면 그 제목이 납득이 간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딱히 의사나 과학자는 아니고, 주인공을 찾아오는 마지막 생존자 따위도 없다. 사실 소설에는 마지막 남은 구인류와 과거의 인류와 대척하는 신인류가 있다. 일종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나타난 신인류는 우리가 생각하는 뱀파이어의 정의에 부합하게 낮에는 활동을 하지 못한다. 오직 밤에만 활동할 수 있고, 낮에는 가사상태에 빠지는데, 마지막 인류인 주인공은 낮에 가사상태의 좀비를 사냥하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와 철통같이 방어한다.

주인공을 찾아왔던 여성은, 마지막 연민을 가지고 와서 그에게 떠나라 한 것이지만 그는 거부하고, 어느날 밤 좀비들의 총공격으로 요새는 함락되고, 그는 좀비 아니 신인류의 포로가 되어 사형대에 선다. 사형대에 오르기전 연민을 가졌던 여성은 그에게 독약을 준다. 고통없이 죽을 수 있도록.

사형대에 서서 그는 자신을 애워싼 사람들을 둘러보고 그들의 두려움에 가득찬 시선을 보면서 깨닫는다. 나는 전설이다. 저 사람들에게 나는 전설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끝난다.

영화와 소설은 큰 이야기 흐름이 비슷한 듯 보이지만 크게 다르다. 일단 영화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웅담을 따라간다. 인류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을 때, 인류의 구원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과학 (혹은 이성)의 승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주인공의 생존 여부에 상관없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그에 반해서 소설은 일종의 창세기를 그린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인류의 멸망이라는 비극이나, 또 다른 의미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낸 새로운 인류의 시작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새로운 인류의 시작점에서 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악마이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 남은 인류의 희망이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시대에서는 전설 속의 마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를 계기로 그의 단편선을 사서 읽어보았다. 거창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이야기에 반해 분량은 그리 많지 않고, 이 유명한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책 제목으로 따온 두꺼운 책의 나머지 부분은 리처드 매드슨이 쓴 다른 단편 소설들로 채워져 있다. 이 외의 다른 소설들도 기묘한 매력이 있다. 한 권 사서 읽어보아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Secret Life of Walter Mitty)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화면이 기억나는 영화로 한 번 씩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고는 했는데, 마침 여자친구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핑계로 나도 다시 이 동화에 빠져들었다. 주인공은 영화 제목에 나왔듯이 월터 미티, Life라는 잡지사에서 네거티브 필름 현상 전문가로 근무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철이 든 후로 꽤나 삶을 재미없게 살아온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가도 갑자기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든다. 영화에서는 멍때리기 (zoomed-out)이라고 표현한다. 사실 사건이 시작되는 이 영화의 시작부는 약간 지루하다. 월터의 망상은 만화적인 재미가 있지만, 너무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하다. 그리고 끝도 지극히 평범하다. 이 영화의 끝에서 어떤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회사에서 잘리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평범하고 언뜻 지루할 수 있는 시작과 끝 사이에서 우리의 주인공 월터는 그가 이제껏 해왔던 망상보다도 훨씬 더 상상같은 현실로 뛰어들어간다. 아마 영화에서 의도한 것일테지만, 이 모험의 시작은 마치 그의 또다른 멍때리기처럼 시작된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그린란드에 도착하고나면, 아 지금 그는 현실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가 여행을 떠난 이후로 그는 망상을 시작해도 멍하니 있지 않는다. 그가 짝사랑하던 여인 셰릴에 대한 망상은 되려 그가 용기를 내서 주정뱅이가 운전하는 헬리콥터에 뛰어오를 수 있게 해주니까. 그리고 점점 월터가 상상을 하는 시간은 줄어들고, 마침내 없어진다. 한국어 제목처럼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기보다, 나는 이제 그가 더 이상 망상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고 믿는다. 애초에 그가 망상을 했던 것은 팍팍한 현실 너머를 갈망해서인데, 이제 그 너머를 직접 겪었으니 망상이 필요없어진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 모험 끝에 그가 발견한 것은 사실 지극히 지루하게 여겨지기도 했던 그의 인생이 사려깊은 어떤 사람의 눈에는 삶의 정수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이 영화를 보면서 더 빠져들었던 것은, 지금 나도 예전과는 다른 종류의 어떤 용기를 내서 지금까지 내가 그래왔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 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매일 핏빗을 차고 다니는데, 요 일주일 정도는 평소 심박수가 100을 넘나든다. 그 전에는 보통 5660, 높아봐야 70 정도였다.) 매순간 약간씩은 긴장되고 불안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잘해나가는 것이라고 믿어본다. 그 와중에 이 영화는 지금 내 상황과 맞물리며 내게 큰 응원이 되었다.